회차 2
"주문 받아. 지금 바로 그쪽으로 갈게."
더 이상 도희준에게 집중할 필요도, 온순하고 헌신적인 아내 역할을 할 필요도 없어진 강송완은 즉시 직장으로 복귀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다시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강송완의 표정은 진지했다. 도희준은 순간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눈빛과 태도가 갑자기 달라져 있었다. 예전 같지 않았다.
도희준은 강송완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녀가 그렇게 단호하게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할 줄 몰랐던 그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강송완은 처음부터 그를 온 마음 다해 사랑했던 거 아니었나? 그랬던 그녀가 왜 이렇게 쉽게 이혼 서류에 서명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일부러 타협하는 거라고 생각한 도희준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경고하듯 말했다. "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강송완."
강송완은 전화를 끊고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내가 왜요?" 그녀가 반박했다.
강송완은 한때 도희준을 너무 사랑했기에 묵묵히 참고 견뎠었다. 하지만 이제 그와 남이나 다름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강송완은 뻔뻔한 두 사람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돌아서서 저택을 나가버렸다. 그녀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걸어나갔다.
소주희는 여전히 강송완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도희준을 보고 질투심을 느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그녀의 휴드폰이 울렸다. 소주희는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소식이야, 희준 씨! 아이리스가 우리와 함께 일하기로 했어. 그쪽 매니저한테서 문자가 왔어."
그 말에 도희준은 정신을 차리고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게 정말이야?"
최근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도씨 그룹의 디자인 부서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회사의 디자이너가 겁 없이 디자인을 표절한 것이다. 마감일을 맞추지 못한다면, 회사는 고객에게 수천억 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이제 5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 대규모 프로젝트를 완료할 수 있는 유일한 디자이너는 업계 최고의 디자이너인 아이리스뿐이었다.
급한 대로 도씨 그룹은 끊임없이 연락했지만 계속 거절당했었다. 그런데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소주희가 해결한 것이다.
그녀는 도희준에게 메시지를 보여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야. 오늘 밤에 협상하러 가면 돼. 밤새 아이리스의 매니저를 설득한 보람이 있네."
아이리스는 명성 있는 디자이너였지만 성격이 까다롭고 괴팍하기로 유명했다. 최근 3년간 아이리스는 아무런 작품도 출시하지 않고 잠작한 듯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녀와의 협업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매니저를 통해 연락해야 했지만, 매니저 역시 사람을 계속 피하기만 했다.
도희준은 소주희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주희야, 네가 나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알고 있어. 약속 꼭 지킬게."
그의 말에 힘껏 고개를 끄덕이던 소주희는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움츠렸다. 도희준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소주희는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괜찮아."
도희준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잠시 주저하던 소주희가 원피스 자락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무릎의 큰 멍이 드러났다.
장시간 무릎을 꿇고 있어서 멍이 든 것이었다.
도희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이리스가 그들과의 협업에 동의한 이유를 비로서 깨달았다. 소주희가 무릎을 꿇고 간곡하게 부탁한 결과였다.
깊은 감동을 받은 도희준은 그녀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주희야, 나를 위해 힘써줘서 정말 고마워."
소주희는 수줍게 대답했다. "당신에게 도움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불타올랐다. 도희준은 다시 그녀를 감싸고 침대에 눕혔다.
한편 강송완은 자신의 디자인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3년 동안 떠나 있었던 익숙한 작업실을 둘러보자 후회가 몰려왔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에게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그녀의 매니저 유담이 그녀를 발견하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그녀는 커리어우먼 같아 보였다. 그녀는 강송완을 꼭 껴안고 말했다.
"아이리스! 드디어 돌아왔네! 너무 보고 싶었어."
강송완의 얼굴에 죄책감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 담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자, 그럼 이번에 들어온 주문에 대해서 말해 봐."
유담은 이번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강송완을 소파로 데려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고객은 소주희 씨야. 도희준 씨를 위해서 찾아왔었어. 자세한 내용은 서류를 봐."
그 말을 들은 강송완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세상 참 좁기도 하지! 당당하게 강송완을 내쫓을 때는 언제고, 도희준은 지금 그녀의 도움이 절실한 듯해 보였다.
회차 3
유담은 놀란 표정으로 강송완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씨 그룹이면 네 남편 회사 아니야? 왜 직접 관여하지 않고 나를 연락하게 만든 거야?"
강송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디자인 부서의 위기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강송완은 도와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도희준은 오히려 그녀에게 문제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화를 냈었다.
강송완은 조롱하듯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우리 이혼했어, 담아."
그들의 결혼생활은 겨우 3년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도희준을 도합 10년 동안 사랑했다. 의미 없이 10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니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는 것도 당연했다.
강송완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유담은 눈을 크게 뜨고 혀를 차며 말했다. "드디어 콩깍지가 벗겨졌네. 내가 그랬잖아. 전 애인을 잊지 못하는 나쁜 자식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내가 네 마음을 바꾸려고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다 귓등으로 들었잖아. 한바탕 고생을 하고 나서야 깨달으셨나 보군요."
강송완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한때 반짝이던 그녀의 눈은 이제 생기가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부딪혀봐야 아픈 줄 아는 거야. 지금부터는 내 사업에만 집중할 거야."
"잘 생각했어! 그 말만을 기다렸어. 사랑 따위는 잊어버려! 가장 중요한 건 너의 커리어라고." 유담이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계획은 있어? 200억 따위 개나 주라고 해. 우리 그냥 불륜남녀를 골탕이나 먹이자고."
강송완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늘 그렇듯이 애매모호하게 대답했지?"
유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의 협업은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일단 별문제 없으면 주문을 받긴 하지만, 확실하게는 답을 하지 않는다. 협력할 고객에 대한 더 상세한 추가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 고객이 품성이 악랄한 사람일 경우 즉시 협력 관계를 중단하게 된다.
강송완은 그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파일을 검토해 보니, 도씨 그룹은 마감일을 맞추지 못할 경우 고객에게 수천억 원을 보상해 줘야 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좋아. 계속 이렇게 희망고문 하라고 해. 아, 오늘 밤 스카이 빌딩에 갈 거라고 전해줘."
스카이 빌딩은 상류 계층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부유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영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소주희는 도희준의 팔을 감싸 안은 채 룸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희준 씨, 오늘 밤 거래는 순조롭게 진행될 거야. 걱정 마."
도희준은 미소를 지으며 소주희의 허리에 팔을 감싸며 말했다. "모두 주희 네 덕분이야.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소주희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마음속으로는 다른 꿍꿍이셈을 하고 있었다.
이 거래만 성사되면 도희준은 그녀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을 것이고, 그를 정말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고 믿게 될 것이다.
미팅은 저녁 7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룸의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복도가 훤히 보였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소주희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는 충격에 빠진 채로 그 사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잘못 봤나? 강... 강송완?'
강송완을 본 도희준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평소에 입던 캐주얼 한 셔츠와 헐렁한 바지 차림이 아닌, 날씬한 몸매를 강조하는 몸에 꼭 맞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긴 머리는 자연스러운 웨이브로 스타일링 되어 어깨 위로 늘어뜨려 있었다. 긴 목선과 가는 허리가 강조되어 우아하고 매혹적이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확 달라진 강송완의 모습에 도희준은 순간 넋을 잃고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만화를 찢고 현실 세계에 들어온 캐릭터와 같았다.
그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겨우 하루 사이에, 어떻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 있지?
어제까지만 해도 지루하고 평범한 그의 아내였는데 지금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강송완은 그들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