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펠로우십 자리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이현 씨.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수화기 너머 이사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하지만 조건은 이해하고 계시죠? 6개월, 완전한 고립. 외부와의 접촉은 일절 금지입니다.”
“이해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건 바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사라질 수 있는 장소.
“모든 준비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가 약속했다. “여행 계획만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무감각을 뚫고 희미하게 피어나는 희망 같은 것을 느끼며 말했다. “취리히에서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집.
현관문을 열자 우리 삶의 상징들로 가득 찬 거실이 나타났다. 카운터 위의 커플 머그잔 한 쌍. 벽난로 위 선반에 놓인 결혼식 날 사진, 그가 나를 굳게 껴안고 있는 모습. 그가 나를 위해 사준 캐시미어 담요가 우리가 함께 영화를 보던 소파 위에 걸쳐져 있었다.
역겨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부엌에서 쓰레기봉투를 집어 들고 폭풍처럼 집안을 휩쓸기 시작했다. 머그잔이 먼저 들어갔고, 봉투 바닥에서 산산조각 났다. 사진 액자가 뒤따랐고, 유리가 금이 갔다. 나는 액자에서 우리의 모든 사진을 찢어내고, 잘게 조각내어 던져 넣었다. 담요, 내 옷장 속 그의 옷들, 그가 ‘출장’에서 사 온 바보 같은 기념품들.
모든 것이 봉투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불타는 분노로 그 봉투들을 길가에 끌어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 옷, 내 책, 내 건축 모형들. 내 것인 모든 것. 나는 운송 회사에 연락해 내 짐들을 내가 작업실로 쓰던 예전 아파트로 배송해달라고 요청했다.
강태준은 그날 밤 집에 오지 않았다.
그는 다음 날 저녁, 피곤하지만 미소 띤 얼굴로 들어왔다. 서류 가방을 내려놓고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팔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를 감쌌다.
“하,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그가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속삭이며, 입술로 내 관자놀이를 스쳤다.
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셔츠에서 다른 여자의 희미하고 달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그가 그 아기를 안고, 유채리에게 입 맞추는 모습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메스꺼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왜 그래, 이현아? 몸이 차가워.”
“괜찮아.” 나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안 괜찮잖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집했다. “아파? 병원 가자.”
그 위선이 숨 막혔다. 그는 다른 가족과 밤을 보낸 후에도 이렇게 완벽하게 걱정하는 남편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안 아파.” 내가 말했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서류 가방에서 선물로 포장된 상자들을 꺼냈다. “선물 사 왔어. 출장 갔다가.”
그는 출장의 증거까지 위조했다. 내가 싫어하는 디자이너의 실크 스카프. 내가 절대 쓰지 않을 향수 한 병. 각각의 선물은 그의 기만의 깊이를 증명하는, 정교하게 구축된 거짓말이었다. 이 선물들의 가격이면 작은 스타트업 하나를 차릴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은 무가치했다.
소리치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상자들을 던지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가 예전에 그랬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지금의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 속에서 익사하고 있는 여자 사이에 갇혀 있었다.
그는 내 침묵과 충혈된 눈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야, 이현아? 말해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기 갖고 싶어, 태준 씨. 지금 당장.”
그의 표정이 변했다. 공포의 빛이 스쳤다가, 이내 지친 인내의 가면으로 바뀌었다. “우리 얘기했잖아. 지금은 시기가 안 좋아.”
“당신한테는 언제나 시기가 안 좋지.” 내가 쏘아붙였다.
“회사가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똑같은 변명. 언제나 똑같았다.
“나는 스트레스 안 받는 것 같아?” 내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 아이 갖고 싶다고, 태준 씨. 당신이랑.”
그의 전화가 울리며 그를 구했다. 발신자 정보가 없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흘끗 보았다.
“회사 일이야.” 그는 이미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나가봐야 해.” 거짓말.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는 그의 배신의 낙인처럼 느껴지는 제스처였다.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자.”
나는 창밖으로 그가 차에 올라타 밤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싸울 힘이 빠져나가고, 뼛속까지 시린 통증만이 남았다. 그는 그녀와는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나와는 안 된다. 그 생각은 물리적인 충격이었다.
내 시선은 커피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두 번째 휴대폰, 그가 ‘해외 업무용’이라고 주장하던 그 폰에 꽂혔다. 그는 서두르느라 그것을 잊고 갔다. 화면이 메시지와 함께 밝아졌다.
유채리로부터: “이안이 열이 다시 올라. 계속 아빠 찾네.”
그는 내가 달라졌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집이 반쯤 비었다는 것도. 아내의 심장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도.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또 한 방울. 심장의 통증은 너무나 강렬해서 물리적인 감각으로 느껴졌지만, 갑작스럽고 격렬한 복부 경련에 가려졌다.
나는 앞으로 몸을 숙이며,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구토했다.
몸이 이상했다. 이건 단순한 상심이 아니었다. 차갑고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적이자 저주인 가능성.
그는 그날 밤 집에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혼자 병원에 갔다.
의사는 초음파 화면을 보며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미소 지었다.
“축하합니다, 서이현 씨.”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느낄 수 없는 기쁨으로 밝았다. “임신 6주 차입니다.”
회차 3
나는 의사의 진료실을 멍하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가 살균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임신. 6주. 나는 아직 평평한 배에 손을 얹었다.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작고 순수한 생명. 왜 하필 지금일까? 왜 이 모든 것이 폐허가 된 한가운데, 이 순간에 찾아와야만 했을까?
긴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근처에 서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는 유채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는 위로의 말을 속삭이고 있었고, 그의 표정은 내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다정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큰 화분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들의 말을 명확하게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유채리의 목이 멘 속삭임이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그 여자, 뭐 눈치챈 거 아닐까?”
“걘 날 믿어.” 강태준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무심하고 경멸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나를, 내 지성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는지를 드러내는 부주의한 한마디였다.
“하지만 언제 나를 당신 아내로 만들어 줄 거야?” 유채리가 절박한 야망이 섞인 목소리로 다그쳤다. “언제 나랑 이안이한테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줄 수 있냐고?”
“채리야, 그만해.” 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목소리에 강철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현이는 내 아내야. 그건 변하지 않아.”
숨이 멎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야.” 그가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 부드러워졌고, 죄책감처럼 들리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저지른 짓에 대한 속죄라고.”
유채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침묵했다. 그는 그녀를 다시 한번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넌 나한테 아름다운 아들을 줬어, 채리야.” 그가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난 언제나 너희 둘을 책임질 거야.”
그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유채리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그녀의 시선이 내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놀라움이 없었다. 오직 차갑고 의기양양한 승리의 빛만이 번뜩였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내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화분 뒤에서 나왔다. 몸이 떨렸다. 참고 있던 눈물이 뜨겁고 멈출 수 없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의 통증은 나를 짓누르는 물리적인 무게였다.
그는 죄책감 때문에 나와 이혼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다른 가족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거지? 빈자리를 채우는 사람? 그가 더 이상 느끼지 않지만 깨기에는 너무 비겁한 약속의 상징?
그의 약속, 그의 서약이 떠올랐다. “병들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는 그런 확신에 차서 그 말들을 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배신했다. 그리고 이 사랑, 이 유독하고 부서진 것은 내 인생에서 도려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병원을 떠나기 전, 나는 다시 접수처로 돌아가 예약을 잡았다. 낙태 수술.
그리고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이혼 서류 준비해주세요.” 나는 차갑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걸 반으로 나누겠어요. 제가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것을요.”
병원 주차장 차 안에서 앉아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강태준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쉬고 지쳐 있었다.
“생일 축하해, 이현아.”
나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혼돈과 고통 속에서, 내 생일은 까맣게 잊혔다.
“어젯밤 일은 정말 미안해.” 그가 능숙한 후회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실에 급한 일이 터져서. 집에 아예 못 들어갔어.”
씁쓸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올 뻔했다. “알았어.” 나는 말했다. 두 단어가 입안에서 먼지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 질문 없는 태도에 안도하며 반대편에서 긴장을 푸는 듯했다. “오늘 밤 당신을 위해 갈라 파티를 준비했어. 당신 생일이랑, 당신이 설계한 박물관 신관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서. 당신한테 잘해주려고.”
“알았어.” 나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반복했다.
1년 전이었다면, 그 말들은 나를 행복에 겨워 울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것들은 그의 정교한 거짓말에 또 다른 겹을 더할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핸들을 꽉 쥔 채 전화를 끊었다.
창밖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깊고 오싹한 예감만이 느껴졌다. 그는 무슨 일이 닥쳐올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소중한 무언가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그것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