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한지영은 침실로 들어가 짐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른 휴대폰을 꺼내, 오래도록 잠잠했던 메신저에 로그인했다.
그녀는 단 몇 명뿐인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 이혼했어. 이제 싱글이야.]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고, 채팅방 프로필 사진들이 연달아 깜빡였다.
먼저 레이서 케이가 답장을 보냈다. [지영 누나, 해킹당한 거야?]
다음으로 의사 강도현이 답장을 보냈다. [대박! 우리 언니 드디어 자유 되찾았네! 오늘 밤 클럽 가자. 취할 때까지 축하해야지!]
그리고 해커 제트가 메시지를 보냈다. [위치 보내. 인터넷 기록 싹 다 지워 줄까? 무료 서비스야. 그 노성재, 절대 못 찾게 해 줄게.]
마지막으로 주얼리 디자이너 정소윤이 말했다.[드디어! 내가 진작 말했잖아. 그 사람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기다려! '리버스' 컬렉션 한 세트 보내 줄게. 그놈들 눈 멀게.]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언제나 시끌벅적한 친구들을 보며 한지영의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 [장난 아니야. 방금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어. 이따 늘 가던 데서 보자.]
메시지를 보낸 그녀는 드레스룸 가장 안쪽에 있는 숨겨진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옷가지 대신 검은색 금속 상자가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지문으로 잠금을 해제했다. "찰칵" 소리와 함께 상자가 가볍게 열렸다.
상자 안에는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차가운 빛을 띠는 수술용 메스 한 자루, 독특한 모양의 레이싱카 키 몇 개, 얇지만 최고 사양의 노트북 한 대, 그리고 예술 작품이라 할 만큼 정교한 선으로 가득한 두툼한 디자인 스케치 한 뭉치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꼬박 3년 동안 봉인해 두었던 것들이었다.
노 사모님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해내기 위해, 한지영은 자신의 날카로움과 열정, 그리고 과거까지 모두 이 빛 닿지 않는 구석에 잠가 두었다.
이제, 다시 꺼낼 때가 되었다.
한지영은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화면에 익숙한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오가며 노씨 그룹 내부 시스템에 침투했다.
지난 3년간 그녀가 처리했던 모든 위기 기록,노씨 그룹이 구씨 가문과 협력하려 했을 때 실제로는 그녀가 개발했던 핵심 기술까지, 모두 흔적도 없이 삭제해 버렸다!
노성재는 지금까지도 그 모든 걸 단순히 운이 좋았거나, 유능한 부하 덕분이라고만 여겼다. 그는 그녀가 얼마나 많은 밤을 홀로 새우며,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치워 줬는지 영원히 모를 것이었다.
화면에 '기록 삭제 완료'라는 문구가 떠오르자, 한지영의 눈빛은 고요했다.
이혼했으니, 이제 깨끗하게 끝난 것이었다. 그녀는 노씨 가문에 빚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노씨 가문 역시 더는 그녀에게서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할 것이다.
노트북을 덮은 그녀는 절친인 윤하정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나 자유야."
상대방은 거의 1초 만에 답장을 보냈다. "10분만 줘. 노성재 그 자식 집 앞까지 가서 바로 데리러 갈게."
윤하정은 원래부터 행동이 빠르고 과감했다. 10분이라더니, 채 6분도 되지 않아 그녀의 눈에 띄는 스포츠카가 이미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올블랙의 시크한 차림을 한 윤하정은 차에 기대 서 있다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한지영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여왕님, 드디어 탈출했네! 축하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마술이라도 부리듯 등 뒤에서 샴페인 한 병을 꺼내더니 엄지로 코르크를 가볍게 밀어 올렸다.
"펑!"
코르크 마개가 날아가고, 풍성한 거품이 뿜어져 나왔다.
석양 아래 반짝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샴페인은 한지영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윤하정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소금은 못 챙겨 왔네. 샴페인으로 액운 좀 털어 내자!"
차가운 샴페인이 옷을 적셨지만, 한지영은 춥기는커녕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좋았다. 노성재를 떠나자, 그녀의 생기 넘치던 인생이 마침내 다시 시작되었다.
윤하정이 한지영에게 차 키를 던지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손 좀 풀어볼래?"
"타." 한지영은 차 키를 받아 들고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았다.
부가티 베이론이 낮은 엔진음을 내며 별장을 빠져나가 도로 위 차량 행렬에 합류했다. 속도는 빠르면서도 안정적이었다.
윤하정은 좌석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며 물었다. "말해 봐. 대체 뭐가 네 그 사랑밖에 모르는 병을 고쳐 준 거야?"
"노성재의 첫사랑이 돌아왔어." 한지영은 정면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둘이 다시 만났어."
윤하정은 바로 폭발했다. "그 여자는 양심도 없나? 예전에 자기가 먼저 돌아섰다가, 3년 뒤에 또 기어들어온다고? 세상에 남자가 노성재 하나뿐이야? 왜 남의 남편한테 들러붙고 난리야!"
그녀는 점점 더 흥분하며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노성재 그 개자식! 진짜… 개 버릇 못 준다더니! 똥개도 갓 싼 똥을 먹는다는데, 걘 어떻게 그 묵은 똥만 골라 먹냐!"
한지영은 어이없다는 듯 속으로 생각했다. '그 비유는 대체 누굴 욕하는 거지?'
윤하정은 말이 좀 심했다 싶었는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내가 열받아서 그래! 걔들이 바람피우는 건데 왜 네가 빠져 줘? 왜 그 둘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냐고! 그 최서윤, 그냥 피아노 좀 친다는 거잖아. 정면으로 부딪쳐!"
"그러고 나면?" 한지영이 되물었다. "사람들한테 내가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라는 걸 다 알리라고?"
"그래도 이건 너무 걔들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거잖아!"
"아니." 한지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과거를 단호히 끊어내는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이제부터 난 그냥 한지영이야. 더는 누구의 부속품도 아니고."
"그래, 바로 그거지!" 윤하정은 감정이 끓어오르는 만큼 식는 것도 빨랐다. "이렇게 좋은 날, 축하해야지! 바로 클럽 가자?"
"좀 이따 가. 한지영이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일단 나랑 어디 좀 가 줘. 스타일 좀 바꿔야겠어."
"진작 바꿨어야지!" 윤하정의 눈이 반짝 빛나더니,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네가 잠적한 3년 동안 의학계에서 너 찾느라 난리도 아니었는데, 언제 복귀할 생각이야?"
한지영의 표정은 담담했다. "이제 때가 됐어. 소문 좀 퍼뜨려 줘."
"아, 그리고 네 전남편도 너를 찾고 있다더라. 그 첫사랑 치료해 준다고… 또…" 윤하정이 가볍게 웃었다. 그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 인간은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거야. 자기가 헌신짝처럼 내버린 그 돌멩이가… 지금은 무릎 꿇고 빌어도 닿을 수 없는 전설 속의 그 인물, 신의 S 라는 걸."
윤하정의 미소에 차가운 기대감이 어렸다. "진실이 전부 드러나는 그 순간… 노성재, 그 언제나 오만하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정말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