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사진 오라버니, 저보다 언니가 더 놀라신 것 같으니 언니 곁에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가연은 소씨 부부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 피곤한 것 같으니 쉬고 싶습니다."
몸이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천사진을 한 번이라도 더 봤다간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죽일까 봐 두려운 것이 얼른 자리를 뜨려고 한 더 큰 이유였다.
"그래 가연아.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으니 얼른 들어가 쉬거라." 소씨 부인은 청아에게 소가연을 잘 모시라고 지시했다.
처소 문지방을 넘는 순간, 소가연은 자신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당장 죽일 수 없는 상황에 가슴이 옥죄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사진과 소연우가 다정하게 붙어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그래, 서로를 마음에 품었다고 했지? 어디 알콩달콩 둘이서 잘 즐겨 보거라. 너희들이 죗값을 치러야 할 차례가 곧 올 테니.'
청아를 밖으로 내보낸 뒤 그녀는 연공(練功)을 시작했다. 자세를 잡고 내력을 끌어올리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아직 공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천사진을 방해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내력을 얻었었다. 내력을 얻기 위해 천기각(千機閣)에서 밤새도록 겪었던 고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연꽃연(荷花宴, 연꽃축제)이 열리는 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날 연회에서 그녀의 삶을 망치기에 충분할 정도의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 반드시 무공을 익혀야 했다.
그녀는 몸에 난 상처를 빨리 치료하기 위해 약을 지어오라고 청아에게 분부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해 몇 가지 약은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날 밤.
"아가씨,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청아는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소가연을 보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아야, 너만 모른 척하면 된다. 잠시 밖으로 나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네가 여기서 내 옷으로 갈아입고 소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행세를 하거라. 누가 오든 문을 열어주지 말고, 내가 이미 잠들었다고 하거라. 알겠지?" 소가연은 소씨 가문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청아뿐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꼭 몸조심하여야 합니다." 아가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청아는 더 만류하지 않고 소가연의 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하는 것은 둘째 아가씨 행세를 잘하는 것 뿐이었다.
소가연은 몇 가지 약을 몸에 소지한 후 아무도 몰래 밖으로 나갔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기각을 찾아 나섰다.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까지 겨우 1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언뜰거렸다. 진한 살기가 느껴지며 바람을 타고 옅은 피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풀숲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 설마 저택을 나오자마자 살인을 목격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검은 그림자들은 주위를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바람에 풀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것을 확신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한숨을 채 쉬기도 전에 목이 갑갑해나더니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죄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기살기로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커다란 손이 갈고리처럼 목을 잡고 있어 도망칠 수 없었다.
이내 귓가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면 죽는다!"
남자의 말에 소가연은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다치셨습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남자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미천하지만 의술에 능통합니다. 나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등 뒤로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살기를 느끼며 그녀는 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남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바로 그녀의 목을 비틀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억!" 그때 남자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툭 쓰러졌다.
목을 죄고 있던 남자의 손에 힘이 풀리자 소가연은 단숨에 몸을 빼서 돌아섰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키가 크고 풍채가 빼어난 남자가 풀숲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 부위 흰옷이 피로 흥건하게 적셔져 있는 것을 보아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소가연은 자리를 뜨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이대로 뒀다가는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다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목을 움켜잡을 지도 몰랐다. 잠깐 고민하던 소가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남자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무엇을 하려는 게냐?"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눈빛이 날카롭고 살기가 가득했다. 비록 하반신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숨통쯤은 쉽게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소가연은 잘 알고 있었다.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 저의 의술로 나리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드리고자 할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소가연은 악의가 없다는 것을 다급하게 설명한 뒤 남자가 반대하지 않자 침을 꼴깍 삼키고 잡힌 손을 빼내었다. 하얀 옷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남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뱀 형태의 암기(暗器)가 남자의 왼쪽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암기 주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맹독이 묻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북쪽 사막지대(北漠)에만 있는 적염사(赤焰蛇)라는 뱀의 독입니다. 중독되어 반시진(半时辰, 1시간) 내에 해독하지 못하면 전신이 마비되어 침을 삼키는 것조차 어렵게 됩니다. 몸 안에서 확산된 독소가 오장 육부를 서서히 태워 결국 숨이 끊어지게 됩니다. 나리는 오늘 운이 좋은 겁니다. 마침 제가 해독약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소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염이라는 뱀독은 그녀에게 익숙한 독이었다. 전생에 이 독 때문에 모진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이미 혀가 마비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미 몸 전체가 마비되었고 몸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뜨거운 느낌이 전해졌다. 남자의 얼굴에 낙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부주의로 작전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다니.
소가연은 몸에 지니고 온 해독약을 꺼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챙긴 약인데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는 나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리의 가면을 벗겼다고 제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강호(江湖)에서는 남의 얼굴에 쓴 가면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이를 어기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예상사였다. 하지만 이 남자를 구원하려면 가면을 벗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소가연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미리 남자에게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말한 것이었다.
허업! 조심스럽게 남자의 가면을 벗긴 소가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세상에나,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 이렇게 빼어난 미모를 가졌으니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할 테지. 아니면 양반가문 규수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의원의 눈에는 남녀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나리가 저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던 소가연은 면사(面紗) 한귀퉁이를 살짝 들어올리고 해독약을 자신의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남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 뒤 혀로 약을 남자의 입 속에 밀어 넣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입술은 이런 느낌이군⋯" 남자를 도와 약을 모두 삼키게 한 다음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감빨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자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남자의 눈길을 피했다.
남자의 몸에서 암기를 빼낸 그녀는 검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뭔가를 결심한 듯 해독약을 삼키고 자신의 입으로 상처에서 독이 퍼진 피를 빨아내기 시작했다.
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시간을 단축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암기가 박힌 곳은 하필이면 남자의 사타구니였다. 그녀의 뜨거운 입김이 사타구니에 닿자 남자는 참지 못하고 낮은 신음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온몸이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말초적인 감각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