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1

"임나연,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세미에게 사과해!"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넓은 거실을 가로지르며 울려 퍼졌다.

임나연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주머니 안에 숨겨둔 작은 녹음기를 꼭 쥐었고, 시선은 천천히 소파에 앉은 그녀의 셋째 오빠, 임호건에게 향했다.

그의 곁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임씨 가문의 양녀, 임세미가 천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임나연의 친 오빠가 그녀더러 양녀인 임세미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며 다그치고 있다.

"네가 일부러 세미를 계단에서 밀었잖아.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 역겹다, 정말! 너 같은 사람이 내 동생이라니…" 임호건이 말했다.

'역겹다'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임나연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가슴을 짓누르는 숨 막히는 아픔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난 그런 적 없어..."

하지만 임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호건은 테이블에서 유리컵을 집어 들어 그녀를 향해 세게 던졌다. "아직도 변명할거야?!"

유리컵이 그녀의 발등에 부딪힌 후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임나연의 가늘고 흰 발등은 금세 붉게 부어 올랐고, 날카로운 파편이 그녀의 다리를 그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나 임나연은 움찔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임호건이 그녀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거나, 그녀를 다치게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오빠, 제발... 언니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 마." 옆에 있던 임세미가 다급히 말렸다.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이 일은 정말 언니 잘못이 아니니, 언니를 탓하지 마. 그냥 단순한 사고였어."

그 순간, 임호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세미야, 너는 왜 아직도 저년을 감싸는 거야? 바보 같은 동생아, 너도 생각해 봐. 여자애가 몸에 흉터라도 남으면 얼마나 보기 흉하겠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야!"

"하지만… 오빠…"

"그만해, 세미야. 더 이상 저년을 위해 사정하지 마! 이리 와봐, 어디 다쳤는지 보게."

"나 괜찮아, 오빠. 별거 아니야…"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 임나연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임세미가 다친 건 안쓰러워하면서, 내가 피를 흘리며 서 있는 건 아무렇지 않은가? 나도 여자애인데, 그는 자신의 친동생이 다쳤는데도 걱정되지 않는 걸까?'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임나연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고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다.

그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녀를 입양하여 따뜻하게 키워주었다. 그들의 보살핌 속에서 임나연은 한 번도 학대당한 적이 없었고,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임호건은 임세미의 상처를 돌본 뒤, 다시 임나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얇은 조롱의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고 임호건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뭐가 웃겨? 임나연, 2년 전에 우리가 너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분명히 말했잖아.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세미를 친동생처럼 대해야 한다고. 세미는 이 집에서 자랐고 너는 언니로서 세미를 보호하고 아껴야 해.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너는 어떻게 했어?"

임나연은 그의 말에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임호건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진짜 가족으로 대해준 적 없었다.

2년 전, 임씨 가문이 임나연을 찾으러 왔을 때,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가족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이제 혼자 살아갈 필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박학선 어르신의 초대를 거절하고 임씨 가문과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늘 조심했고, 언제나 양보했다.

항상 가장 좋은 건 임세미의 것이었고, 임나연은 늘 뒤에서 그녀가 버린 것만 주워야 했다.

그렇게 계속 인내하고 기다리면 가족들이 그녀를 받아들이고, 그녀도 그들의 일원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임세미에 대한 끝없는 칭찬과 그녀에 대한 끊임없는 질책뿐이었다. 모든 실수는 항상 그녀의 탓이었다.

어느 날, 임나연은 그들의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때 임나연이 밖에서 죽었으면, 우리 가족은 짐을 덜었을 텐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임나연의 숨이 멎었다. 심장이 쥐어짜듯 아파왔고, 손끝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들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을까? 그럴 거면 2년 전, 나를 왜 데려온 거야?'

임나연은 눈을 감았고, 마음은 죽은 연못처럼 가라앉았다. 그 안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더는 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가족을 원하지 않고, 자신을 짐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쫓고 싶지 않았다.

임호건이 다시 그녀를 바라봤을 때, 임나연의 얼굴에는 묘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더 이상 고통도, 원망도, 슬픔도 없었고 오직 차분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 차분함은 임호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손을 치켜들며 으름장을 놓았다. "세미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그러나 임호건이 손을 내리치기도 전에, 한 손이 단단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바로 임나연이었다.

그녀가 그를 막았다!

"임나연, 너!" 임호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2년 동안 한 번도 반항한 적 없던 아이가 지금 그의 손을 막은 것이다.

임호건의 얼굴에 충격이 드러난 것을 보고 임나연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난 임세미를 밀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어."

임호건은 믿지 못하며 말했다. "아직도 변명할 셈이야? 넌 혼나야 해!"

"임호건." 임나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무죄라는 증거를 보여주면, 너와 임세미, 내게 무릎 꿇고 사과할 수 있겠어?"

"뭐라고?" 임호건은 자신이 헛들은 줄 알았고, 곧 분노가 폭발했다. "내가 너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이런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치욕스러웠다.

임세미는 소파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임호건이 임나연을 응징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지만, 임나연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 의구심이 스쳤다.

'증거? 임나연이 뭔가를 가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곧 임세미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순한 미소로 다가왔다. "오빠, 그만해. 언니와 더 이상 싸우지 마."

"세미야, 이년 감싸지 말라고 했지?!" 임호건이 소리쳤고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무슨 증거인지, 당장 꺼내 봐!"

임나연은 전혀 움찔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임세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건… 녹음기? 설마…! 임나연은 어떻게 녹음기를 숨기고 있었던 거지?!'

임나연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이 짧게 울린 뒤, 곧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이 자리 어때?"

임호건은 바로 그것이 임세미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다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임세미, 너 왜 계단에 서 있어?"

그건 분명 임나연의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임세미의 날카롭고 소름 끼치는 말투가 들려왔다. "내가 호건 오빠에게 언니가 나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말하면, 언니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어?"

회차 2

임호건은 고개를 홱 돌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임세미를 바라보았다.

'내가 늘 지켜왔던, 순수하고 착한 동생 세미가… 그런 말을 했다고?'

임세미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고, 급히 변명했다. "오빠, 그런 거 아니야! 이건 사실이 아니야!"

하지만 녹음기는 그녀에게 변명의 틈도 주지 않은 채, 여전히 차갑고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곧이어 들린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경고의 기운이 서린 임나연의 음성이었다. "세미야,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이어서 들린 임세미의 목소리는 냉소가 섞여 있었고, 도발적이었다. "언니가 막으려 해도 소용없어. 어차피 오빠는 항상 내 편이야. 언니 말은 절대 안 믿는 거 알잖아."

그리고 곧, 목소리는 전혀 다르게 변했다. 공포에 젖은 듯한 울먹임이 가득한 연기였다. "으아, 오빠! 언니가 나를 계단에서 밀려고 해! 임씨 가문의 딸이 될 자격이 없대… 언니가 날 쫓아내려고 해! 너무 무서워… 으아, 오빠 도와줘!"

이 모든 걸 들은 임호건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임나연은 임세미를 밀지 않았고 이 모든 건 임세미가 스스로 꾸며낸 자작극이었다! 임세미는 고의로 계단 가장자리까지 가서 두려운 척 연기했고, 그 모든 걸 이용해 임나연을 함정에 빠뜨렸다.

임나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고했다. 그리고 임호건은, 그 함정에 완전히 빠져 자신의 친 여동생을 오해하고 비난했다!

임호건은 멍한 표정으로 임나연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임나연, 내가 널 오해한 거라면…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어?"

그 말에 임나연은 비웃 듯 냉담한 눈빛을 띠었다. 임호건은 자신이 잘못한 걸 깨달았으면서도 오히려 그녀에게 왜 설명하지 않았냐고 탓하고 있다.

"임호건,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기억력은 벌써 퇴화했나 보네."

"나…." 임호건은 입을 뗐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한꺼번에 떠올랐다. 조금 전, 임나연은 자신이 임세미를 밀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다.

하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임나연의 말조차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유리컵을 들어 거칠게 그녀에게 던졌다. 깨진 유리 조각이 그녀의 다리를 베었고,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수치심과 자책이 끓어오른 임호건은 천천히 임세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임세미는 겁에 질린 듯 눈가가 붉어졌고 창백한 얼굴은 떨리고 있었다. "오빠… 내가 잘못했어. 언니를 모함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그냥… 오빠랑 엄마, 아빠를 잃기 싫었을 뿐이야!"

그 말을 듣고 임호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임호건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을 눈치챈 임세미는 기회를 감지했다. 그녀는 더욱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고, 눈물은 그칠 새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셋째 오빠, 난 어릴 때부터 임씨 가문에서 자랐어. 항상 오빠를 내 친 오빠처럼 여겼고, 엄마 아빠도 친 부모처럼 따랐어. 그런데 언니가 돌아오고 나서… 가족들이 날 버릴까 봐 너무 무서웠어… 모두가 진짜 딸인 언니만 챙기고, 나는 밀려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순간 이성을 잃고, 언니에게 그런 짓을 했어. 오빠, 나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어. 정말 잘못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임호건은 임세미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이미 마음이 조금 흔들렸고, 그녀의 고백까지 듣자, 분노가 완전히 사라졌다.

'세미가 무슨 악의를 품겠어? 그저 가족을 너무 사랑했을 뿐이야!'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돌려 임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미가 거짓말한 건 가족을 잃을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야. 어차피 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잖아. 언니니까 동생을 한 번만 봐줘. 용서해 줄 수 있지?"

임나연은 그 말을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의 친 오빠는 방금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를 감싸기는커녕 그녀를 함정에 빠뜨린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임나연은 더는 이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았고, 임씨 가문의 위선적인 얼굴을 한 번만 더 봐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임호건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조차 없이 오만하게 덧붙였다. "임나연, 네가 이렇게 계속 고집만 부리고 세미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면… 그땐 나도 널 이 집에서 내쫓을 수밖에 없어!"

그러나 임나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눈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나를 내쫓을 필요 없어." 그녀가 말했다. "오늘부터, 난 임씨 가문과는 완전히 끝이야. 이 집에 단 1초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아."

임나연은 더 말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했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다. 이 집에서 2년을 살았지만, 가져갈 짐이라고는 작은 캐리어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그녀는 서둘러 짐을 쌌다. 자신의 물건 몇 개와 서류들을 챙기고, 휴지로 베인 다리의 피를 닦아낸 뒤 대충 밴드를 붙였다. 긴 원피스로 상처를 가리고,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텅 빈 방을 빠져나왔다.

임호건은 그녀가 짐을 들고 나오는 걸 보고서야 그녀가 진짜 떠나려는 걸 깨달았다.

임나연은 단순히 화를 낸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임씨 가문과 인연을 끊으려는 것이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임나연, 잘 생각해! 지금 그 문을 나가면, 다시 돌아올 생각 하지 마!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그러나 임나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또박또박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아." 임세미는 곁에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드디어, 드디어 임나연이 떠난다! 이제 임나연도 떠났으니 임씨 가문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거야! 임씨 가문 사람들의 사랑도, 재산도, 전부 다!'

임세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오빠, 언니를 붙잡아야 해! 언니가 임씨 가문을 나가서 어떻게 살아… 누가 해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가게 둬." 임호건은 코웃음을 치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못 가서 울며불며 돌아올 거야. 그때 내가 제대로 혼쭐을 내줄 테니까!"

바로 그때, 바깥에서 한 경호원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임나연이 캐리어를 끌며 나가는 걸 봤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임나연이 임씨 가문에서 아무런 지위도 없고, 존중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라는 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진짜 임씨 가문의 소중한 보물은 임세미였다.

경호원은 급히 거실로 달려들며 외쳤다. "도련님, 아가씨! 귀한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차가 바로 문 앞에 있는데… 박씨 가문 쪽 차량인 것 같습니다!"

'박씨 가문?'

임호건과 임세미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순식간에 흥분이 솟구쳤다.

박씨 가문은 경성 최고 명문 재벌이다!

임씨 가문도 분명 상류층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긴 하지만, 박씨 가문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박씨 가문은 수백 년을 이어온 최상위 가문으로, 오랜 전통을 자랑하며 세력이 전국 곳곳에 뻗어 있는 진정한 명문가이다.

그 동안 임씨 가문은 박씨 가문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성과 없이 끝났다.

그런데 오늘, 박씨 가문에서 직접 찾아오다니?

"빨리 마중 나가자!" 임호건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하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경호원에게 안내하라고 손짓했다.

임세미도 황급히 치마를 정돈하며 따라 나갔고, 얼굴엔 부끄러움 섞인 붉은 기색이 감돌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따라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온 사람이... 혹시, 그 남자일까?'

회차 3

임호건과 임세미는 걸음을 재촉해, 결국 임나연보다 먼저 저택 입구에 도착했다.

경호원이 말한 대로, 고급스러운 검은 차량이 조용히 도로가에 정차해 있었다.

차량 번호판을 확인한 순간, 임호건의 가슴은 요동쳤고,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경성 전역을 통틀어 이 번호판을 사용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 바로 박건우였다.

박건우는 어린 나이에 이미 최상위 명문가 박씨 가문의 수장이 되었고, 박씨 그룹의 현 대표이며, 수천억 자산을 보유한, 경성의 왕이라 불리는 존재였다.

오늘 박건우가 친히 이곳을 찾았다는 건, 말 그대로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듯한 영광이었다.

임호건은 흥분으로 얼굴이 붉어졌고, 빠르게 걸음을 옮겨 차량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고 아부 섞인 목소리로 인사했다. "박 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 찾아오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제대로 마중도 못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임호건이 그렇게 말한 뒤 한참 동안 기다려도 차 안에서는 내려오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없었다. '무슨 상황이지?' 임호건의 미소가 굳어졌다.

이번엔 임세미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살짝 넘기며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차량 앞으로 걸어 나가서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 대표님, 이렇게 친히 오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혹시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하지만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대답은커녕, 기척조차 없었다.

임호건과 임세미는 서로를 쳐다보며 혼란스러워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확실히 박건우의 차였다. 그런데 아무리 정중히 인사를 해도 차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어색한 침묵 속에서 조수석 문이 갑자기 열렸고, 비서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임호건은 그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바로 박건우의 비서, 송학도였다.

임호건은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지금 임씨 가문의 위치로는 박건우 같은 인물과 직접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송학도를 보낸 것만 해도 이미 대단한 배려였다.

박건우의 호의를 얻는 것만으로도 임씨 가문에겐 큰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임호건은 다시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송 비서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무슨 일로..."

그러나 송학도는 단 한 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 말 없이 임호건과 임세미를 지나쳐, 조금 떨어진 곳에 조용히 서 있는 임나연에게 다가갔다.

임호건과 임세미는 그 장면을 보며 마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완전히 얼어붙었다.

송학도는 임나연 앞에 다가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임나연 씨. 박학선 어르신을 대신해 박씨 저택으로 모시러 왔습니다."

'박학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임나연의 가슴속에는 따스한 감정이 번졌다.

어릴 적 고아원에 있던 그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입양되어 사랑 받으며 자랐다.

박학선은 할아버지의 절친이었고, 그는 종종 어린 임나연과 놀아주기도 했다.

송학도가 손에 들고 있는 시계를 보자 임나연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건 박학선 어르신이 오랫동안 차고 다니던 바로 그 시계였다.

어르신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는 임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임나연 씨." 송학도는 친절하게 웃으며 그녀의 캐리어를 받아 조심스레 트렁크에 넣었다.

그리고 뒷문을 열며 말했다. "임나연 씨, 여기 타시면 됩니다."

임나연은 허리를 굽혀 차에 오르려다, 차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차 안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새하얀 셔츠를 단정히 입고 길고 곧은 다리를 느긋하게 꼬고 앉아 긴 손가락으로 종이를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시선을 그녀에게 옮겼다.

임나연의 눈동자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과 마주쳤다.

"난 박건우야."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따뜻했다. "할아버지를 대신해 너를 데리러 왔어."

'박건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임나연의 머릿속엔 어릴 적 기억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혼약을 정해준 적이 있었다. 상대는 바로, 박학선 어르신의 손자 박건우였다.

'그럼, 지금 이 차 안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바로… 내 약혼자?'

임나연은 천천히 뒷좌석에 올라타며 마음을 진정시켰고 검은 리무진은 임씨 저택을 떠나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임호건과 임세미가 얼어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었고, 그들의 차가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수년간 박씨 가문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는데, 오늘 박씨 가문이 찾아온 이유가 임나연 때문이라니? 게다가 송학도는 그렇게 공손한 태도로 임나연을 모셔갔다고?

송학도는 내내 그들에게 단 한 번의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임세미는 이를 악물었다.

임나연에게 밀려나는 건 언제나 그녀를 분노하게 했다. 방금 그 장면은 자신의 얼굴을 바닥에 내던지고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이, 차 안에서 임나연은 조용히 앉아 옆자리의 잘생긴 남자를 몰래 훔쳐보았다. '박건우는… 그 혼약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제발 잊어버렸기를.'

임나연은 그 약속이 이제 와서는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건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꿰뚫어 본 듯, 조용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하고 있어."

임나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가장 두려웠던 순간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관계는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입양아였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를 친손녀처럼 길러주었고, 할아버지의 특별한 지위 덕에 박학선 어르신도 종종 손자를 데리고 놀러 왔었다.

그렇게 임나연은 박건우와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고, 어릴 적엔 사이도 좋았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어른들이 둘을 엮어 혼약을 정해버린 것이다.

어릴 적에는 혼약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특히 박건우와 함께 있을수록 그 압박은 더 심했다.

그도 이 혼약이 달갑지 않은 것 같았고, 종종 임나연에게 차갑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그녀가 옆집 남자아이와 노는 것조차 못마땅해하며 매번 독설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박건우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고, 결국은 서로 얼굴도 보기 싫은 사이가 되 버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임나연은 반항심에 가득 차 할아버지에게 자신은 반 친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혼약을 파기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 소식을 들은 박건우는 그날 밤 그녀 방으로 들이닥쳐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 진심이야? 제정신이야?"

임나연은 그가 그렇게 화가 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둘은 대판 싸웠고, 그날 이후 모든 것이 틀어졌다.

박건우는 유학을 떠났고, 그 이후로 둘은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오늘 차에 탈 때조차, 임나연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박건우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예전에 알던 그 소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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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티아라를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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