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서유나는 다음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군부대종합병원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인 허하준이었다.
허하준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아부가 섞여 있었다. "유나 씨, 이번엔 정말 곤란한 상황이에요. 제 친한 친구의 아들이 희귀병으로 오래 고생했는데 최근 다시 악화됐어요. 지난번에 주신 특효약도 이제는 소용이 없고요. 혹시 직접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서유나는 그에게 곧장 전화를 걸어 답했다. "내일 수업 끝나고 저녁에 진료실로 갈게요. 그 분도 그때 들르라고 전해주세요."
하지만 강민호는 난감한 한숨을 내쉬었다. "VIP 병동에 있어서 외출이 안 돼요. 규정상 움직일 수가 없어요."
서유나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대체 환자가 누군데요?"
잠시 침묵하던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박지헌입니다. 그 박중택의 손자요. 이게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박씨 가문에서 이미 전국에 이름난 의사들을 다 불러 모았어요. 박지헌을 완치하는 사람한테 200억을 준다면서요."
서유나는 그저 눈썹을 한 번 치켜 올리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박씨 가문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전설적인 가문이었다. 그 중심에 선 박중택은 육군사령관 출신으로 대통령조차도 예우할 만큼 강력한 인물이었다.
박지헌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과 서른에 이미 최연소 제독으로 불리며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남자였다. 그의 화려한 전과는 늘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런 인물조차 병으로 무너질 수 있다니, 서유나는 의아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암호화된 메일함을 확인했다. 역시나 국가 보건부에서 보낸 공식 초청장이 들어 있었다.
다크웹에서 "메디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각종 의학 난제를 풀어내며 명성을 쌓았고, 마침내 자신만의 정예팀까지 꾸리게 되었다. 그러니 정부가 그녀를 찾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유나는 침착하게 답했다. "초대장을 확인했습니다. 그 정도 보상이라면 누구라도 혹할 만하네요. 좋아요, 제가 가볼게요."
한편, 박씨 가문의 긴급 요청 소식은 서씨 가문에도 전해졌다. 서민준은 곧바로 뛰어들어 발을 넓힐 기회를 노리며 인맥을 총동원했다.
늘 상류층의 문턱에서 머물던 서씨 가문에게 이번은 절호의 기회였다. 박지헌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마침내 상류 사회에 진출할 수 있을 터였다.
또 다른 소문도 흘러나왔다. Y국의 최고 갑부가 경성에 직접 와서 잃어버린 딸을 찾고 있으며, 단서를 제공하는 이에게는 천문학적인 보수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경성 전체가 술렁였고, 그날 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떠들썩했다.
다음 날.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서유나는 잠에서 깼다. 그녀가 기지개를 켜고 전화를 받자, 반대편에서는 연구 지도교수 문현우의 날 선 목소리가 쏟아졌다. "서유나! 자료를 정리 좀 하라고 했더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연구팀에서 쫓겨나고 싶어? 서지안은 새벽부터 나와 있었어. 지금 당장 연구실로 와!"
서유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흘끗 보니 벌써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제야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고서 속 옛 처방전을 뒤지며 새벽까지 몰두하다가 그만 문현우가 시킨 일을 깜박했던 것이다.
서유나는 하품을 하며 노트북을 켜 간단한 메일을 보낸 뒤,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는 배낭을 챙겨 문을 나서 오토바이를 타고 대학 연구실로 향했다.
주차를 마치고 출입증을 찍었지만, 화면에는 '출입 거부'라는 붉은 글자가 떴다.
연구실 출입 권한이 박탈된 것이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선배 연구원과 함께 서지안이 걸어 나왔다.
그 중 한 명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서유나, 너만 특별 대우라도 받을 줄 알았냐? 지각에 일도 안 하고 교수님 인내심도 이제 한계야. 넌 이제 연구실 출입 금지고 자리도 없어질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