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3

안내 데스크 직원과 깔깔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던 전소월은 설지윤이 들어온 것도 보지 못했다.

"설지윤이 학교 다닐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학교 선생님을 유혹해 논문을 쓰게 했어요. 하하하"

"어머 어머, 정말이에요? 안 봐도 눈에 훤해요.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만 믿고 남자들한테 꼬리를 쳤겠죠." 질투에 눈이 먼 데스크 직원이 말했다.

"예쁘게 생겼다고요? 여우처럼 생겼잖아요. 남자를 유혹하는 일에는 아주 선수예요."전소월은 비아냥 거리며 말했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죠. 남자친구가 엄청 잘생겼다는 소문도 들었어요. 두 사람 같은 학교 친구 맞죠?"

"아니요, 민혁 씨는 지금 제 남자친구예요!" 전소월은 가슴을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어머, 언제부터 사귀었어요? 그 남자가 설지윤을 찼어요?" 데스크 직원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남자친구한테 차여서 그렇게 좋아?" 갑자기 들려오는 설지윤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뭐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놀랬잖아!" 전소월은 설지윤을 쳐다보며 언성을 높였다.

"전소월, 여기서 다른 사람과 내 뒷담화를 할 시간이 있으면 박민혁의 이력서 한 장이라도 더 돌리는 게 어때? 네 월급으로는 절대 박민혁을 만족시킬 수 없으니까."

전소월과 설지윤은 동창 사이였지만, 능력이 뛰어난 설지윤은 이미 회사 팀장을 맡고 있었고 전소월은 아직도 회사 말단 직원이었다. 두 사람이 받는 월급도 차이가 많았다.

그런 설지윤도 평일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주말에는 전단지 돌리거나 CF 모델 등의 아르바이트를 겸행했다. 백수인 박민혁은 평소에 게임을 즐기고, 명품을 잔뜩 사들였으며, 주말에는 친구들과 클럽에서 술을 왕창 마셨다.

하지만 그는 박민혁의 실체를 모두 까발리고 싶지 않았다. 박민혁을 어렵게 그녀에게서 뺏아 간 전소월은 그를 보물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설지윤의 말을 들은 전소월은 그녀가 자신을 질투하는 줄로만 알고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하지 마. 김 씨 그룹에서 면접오라고 했으니까. 김 씨 그룹알지? 대기업이니까 들어 봤겠지? 연봉이 얼만 줄 알아? 1억 2천이 넘어."

전소월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부럽지? 부러워 죽겠지?"

"유치하긴." 설지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소월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실로 들어온 설지윤은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경리가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왜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거죠?" 설지윤은 비서를 쳐다보며 물었다.

"전소월 씨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팀장님이 대신 처리해 달라고 했어요."

비서의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른 설지윤은 서류를 바닥에 내던졌다. "공주님이야 뭐야!"

전소월은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설지윤한테 넘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설지윤은 그녀의 말에 속아 절친이라고 생각하며 업무를 여러번 대신 처리해줬다. 농부와 뱀이 따로 없었다.

하루 종일 서류를 처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설지윤은 물 한 모금 마실 시간조차 없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컵라면을 뜯어 뜨거운 물을 붓고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아직 자신이 암에 걸린 줄 모르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설지윤은 그런 할머니한테 걱정하지 말고 의사 말만 잘 듣고 수술만 무사히 끝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달랬다.

수술 비용도 모두 마련했으니 밥도 잘 먹어야 한다고 당부하는 그녀의 코끝이 시큰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설지윤이 회사 업무가 바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그녀를 위로했다.

통화가 끝날 때쯤, 그녀는 할머니에게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통화를 마쳤다.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열이 오른 설지윤은 회사에 병가를 내고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점심이 되어서야 겨우 몸이 괜찮아진 그녀는 간단한 짐을 챙기고 김 씨 가문으로 향할 준비를 시작했다.

낯선 남자와 함께 한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쳐 가까스로 진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이 되고, 그녀는 트렁크 하나를 챙기고 김완이 보낸 주소로 향했다.

금빛 거리 88호. 금빛 거리는 오래된 주민 구역이다. 좁은 골목 사이에 자전거들이 즐비했고, 쓰레기와 생활용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가파른 골목 길에서 설지윤은 힘겹게 트렁크를 끌고 주위 시민들에게 길을 물었지만 다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결국, 그녀는 길을 잃고 말았다.

안으로 가면 갈수록 고급 주택이 나왔고, 길은 점점 넓어졌으며 고급 외제차들도 보이기 시작했다.

대체 88호 주택은 어디에 있을까?

길을 알려주는 사람들마다 88호 주택을 찾으려면 이 길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고 했지만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어도 그녀는 88호 주택을 찾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김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핸드폰 전원까지 다 나간 설지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낯선 길에서 불안감에 몸이 떨었지만 어쩔 바를 몰라 그저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김완은 오늘 저녁 안에, 그녀에게 자신의 집으로 이사를 오라고 했다. 직접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는 건 그의 잘못이었다.

결국 화가 치밀에 오른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계단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녀와 몇 걸음 떨어진 곳을 비췄다.

설지윤은 환한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차에서 내리는 김완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바닥에 쓰러지면 큰 통증이 느껴질 거라 예상했지만 김완이 빠르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 주어 창피한 모습은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설지윤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거예요?"

"88호 집이 어디인지 모르겠어요."

"설지윤 씨가 저한테 전화 했었어요?" 그는 회사 임원들과 회의를 하는 도중에도 계속 울리는 휴대폰 벨 소리에 하는 수없이 휴대폰 전원을 꺼두었다.

"왜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음에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설지윤은 화가 치밀었다.

"일단 집으로 가요." 설명하기 귀찮았던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집으로 걸어갔다.

깜짝 놀란 그녀가 대문 옆에 걸려 있는 숫자를 빤히 쳐다봤다. 진짜 88호 저택이었다.

김완이 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50대 여성으로 보이는 여자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아줌마, 할아버지는 주무시나요?"

"아니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먼저 거실로 들어간 김완은 뒤에서 낑낑거리며 트렁크를 끄는 설지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높은 계단 때문에 트렁크를 품에 안은 설지윤은 조심스럽게 낑낑대며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그때, 큰 손이 다가와 그녀 손에 쥔 트렁크를 건네 받았다.

김완 손에 있는 트렁크를 보고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그녀와 함께 2년 6개월을 지낸 박민혁이 떠올랐다.

사귀는 동안 이런 도와주는 행동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이 2개인 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박민혁은 짐을 운반하기는 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모두 설지윤 혼자의 몫이었다.

혼자서 힘들게 이사를 하고 청소를 하는 동안, 박민혁은 게임을 하며 바닥이 더럽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빨리 짜장면을 시키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왜 안 들어와요?"

김완의 불만스러운 목소리에 설지윤은 겨우 추억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김완을 따라 마당으로 들어갔다.

마당은 크지 않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었고, 갖가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앗!" 마당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다가 미처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질 뻔했다.

그녀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김완이 눈살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봤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설지윤은 어색한 웃음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를 발견한 그는 발로 치우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크지만 섬세한 손끝에 자리 잡은 굳은살은 그가 오랫동안 헬스를 해왔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그저 의혹스러운 눈길로 그의 손을 빤히 내려다 보기만 했다.

김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먼저 설지윤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설지윤은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피가 솟구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김완은 트렁크를 유연순 아줌마에게 건네고 설지윤의 손을 잡은 채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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