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서하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심도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화장실 밖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자 심준서는 더욱 의심이 짙어졌다.

방금 들린 기침 소리는 분명 서하윤의 목소리였는데.

여긴 남자 화장실이잖아… 서하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심준서는 화장실 칸막이 문을 거칠게 발로 차며 소리쳤다. "당장 안 나와? 서하윤 너 맞지?!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화장실 칸막이 문이 하나씩 걷어차이는 소리에 서하윤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

옷을 입으려 몸부림치는 그녀를 심도윤은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며 속삭였다.

"벌써 겁먹은 거야? 아까는 담도 크더니."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자 서하윤은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약 심준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결혼이 파기되는 건 물론이고 서씨 가문도 끝장날 것이고 그녀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신세가 될 것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심준서가 그들이 있는 칸막이 문을 힘껏 걷어찼다.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한 그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다시 문을 걷어찼다. "안에 누구야! 당장 나오지 못해!"

서하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심도윤이 문을 열려는 시늉을 했다.

서하윤은 정신이 번쩍 들더니 그의 팔을 꽉 끌어안고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안 돼요! 제발…"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억지로 낮게 깔았다.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돼요.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할게요!"

심도윤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물었다. "정말?"

서하윤은 쓴눈물을 삼키며, 눈이 붉게 충혈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르네."

심도윤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널 봐주는 건 간단해. 내 여자가 돼. 내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달려와."

서하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심도윤은 그녀의 약혼자인 심준서의 사촌 오빠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화장실 칸막이 문이 심준서의 발길질에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서하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렇게 할게요. 그 사람이 모르게만 해주세요!"

심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거래 성립."

바로 그 순간, 화장실 칸막이 문이 격렬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활짝 열렸다.

서하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끝장이다…'

그때, 심도윤의 재킷이 그녀의 머리 위로 덮어졌다.

동시에 심준서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 형?"

"누가 함부로 들어오랬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며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간이 부었구나."

"죄, 죄송합니다, 도윤 형. 형이 안에 있는 줄 몰랐어요. 방금 무슨 소리가 들려서… 내 약혼녀인 줄 알고…"

심준서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어렸을 때부터 이 사촌 형을 몹시 두려워했던 그는 심도윤의 태도를 본 순간 다리가 후들거렸다.

"네 약혼녀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해서 내 일까지 방해해?"

심도윤은 차갑게 비웃음을 터뜨리며 재킷으로 가려진 여자를 보호했다. "당장 꺼져!"

살기 어린 목소리를 들은 심준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는 평소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사촌 형이 집안 연회에서 이런 짓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도대체 어떤 여자가 괴팍하고 냉담한 사촌 형을 이렇게 홀렸는지 궁금했다.

이쯤 되니 그는 더 이상 서하윤을 의심하지 않았다. 서하윤은 그런 담력도 없고, 성격도 고지식하며, 이런 수단도 없었기 때문이다.

재킷으로 가려진 서하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심준서가 떠난 것을 확인한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워 입고 나가려 했다.

심도윤은 그런 그녀를 품에 가두며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혜도 모르는 것, 그냥 가려고?"

서하윤은 입술을 꼭 깨물고 두려움에 잠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또 뭘 원하시는 건데요?"

심도윤은 몸을 숙여 가까이 다가와 나직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거래가 성립됐으면, 성의는 보여야지."

서하윤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본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심도윤은 만족스러운 듯 그녀를 놓아주고 옷을 정리한 뒤 화장실 칸막이 밖으로 나갔다.

서하윤은 그제야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옆에 있는 휴게실로 재빨리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심준서의 전화가 걸려왔다. "너 어디 갔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여긴 우리 집안 모임이야! 아직도 네가 서씨 가문 아가씨인 줄 알아? 얌전히 내 옆에서 술이나 따르랬더니, 어딜 멋대로 돌아다녀!"

"미안해요, 준서 씨.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휴게실에서 잠깐 잠들었어요."

서하윤은 미리 핑계를 생각해 둔 듯 억지로 입가를 올려 미소를 지으며, 순종적인 어조로 덧붙였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다음부턴 안 그럴게요."

심준서는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 듯 차가운 목소리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와 심준서의 곁에 얌전히 섰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한 서하윤이 그를 달래려 할 때, 심덕호 어르신이 심도윤을 노기 띤 목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하윤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놈이 갈수록 제멋대로구나! 집안 행사에 손님이 이렇게 많이 왔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고, 모두가 너 하나를 기다리게 해?!"

어르신은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보다가, 이내 심도윤의 목에 난 빨간 자국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목에 그건 또 뭐냐? 또 여자들과 어울렸냐?"

심도윤은 눈을 내리깔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냥 잠깐 만났습니다."

심덕호 어르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욱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만났을 뿐이라고? 이 할애비가 너 같은 몹쓸 놈을 얼마나 더 기다려 줘야 하느냐?"

그는 심준서와 서하윤을 돌아봤다. "회사는 맡기 싫다, 결혼은 하기 싫다, 너보다 세 살 어린 준서는 벌써 약혼한 지 몇 년이고, 약혼녀도 저렇게 얌전하고 싹싹하지 않느냐! 헌데 너는 맨날 그 근본도 없는 계집들이랑 어울려 다녀!"

심도윤은 무심하게 뒤를 돌아보다 서하윤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준서 약혼녀, 참 괜찮네요."

회차 3

특히 침대 위에서, 그녀의 적극적인 모습은 더욱 매력적이었다.

심준서와 심덕호 어르신은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서하윤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심도윤의 눈빛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서하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상황에서 불안한 티를 냈다가는 심씨 집안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십상이었다.

서하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예의 바른 말로 대충 넘어가려 했지만, 심도윤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좀 엄살이 심한 것 같기도 하고, 체력도 영 별로고요."

서하윤은 발끝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심도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설마 아까 그 일을 말하려는 걸까?'

'분명 비밀로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서하윤은 당장이라도 심도윤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의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심준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도윤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심도윤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뼈도 없는 사람처럼 저렇게 기대어 있고 얼굴에 핏기 하나 없는데, 저게 엄살이 아니면 뭐겠어?"

심준서는 그제야 서하윤의 얼굴이 창백하고 손도 차갑게 식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윤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직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할아버지 앞에서 심준서는 신사적이고 다정한 모습을 연기했다. "많이 힘들면 내가 먼저 집에 데려다 줄까? 내일 노성에 가서 계약 건 처리해야 한다며?"

서하윤은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르신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몇 마디 당부한 뒤, 심준서에게 그녀를 데려다주라고 했다.

서하윤은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면서도, 등 뒤에 가시가 돋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를 데려다주는 내내 심준서는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의 서하윤이라면 심서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그의 속마음을 알게 된 데다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서하윤은 바로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몸에 남은 애매한 붉은 자국과 손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늘 그녀의 드레스가 다소 보수적이라서 겨우 가려졌지만, 벗고 나니 그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정신이 혼미했던 순간, 심도윤이 그녀의 허리를 움켜잡고 거칠게 물어뜯으며 거의 온몸을 어루만졌던 기억이 떠오르자, 서하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팬티에 아직도 피가 묻어 있었고 서하윤은 물을 틀고, 피부를 한 겹 벗겨내고 싶을 정도로 몸을 문질러댔다.

'그 개자식…'.

'절대 그 자식의 애인이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지금, 서하윤은 몸에 남은 흔적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처녀막 복원 수술을 예약했다.

회사가 시장을 되찾기 위해서는 심씨 그룹의 투자 자금이 필요했다.

심준서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 약혼은 반드시 해야만 했다.

서하윤은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후 침대에 누워 쉬려는데, 카톡에 친구 신청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까만 프로필 사진에 이름은 간단하게 '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심도윤?!'

서하윤의 호흡이 순식간에 가빠졌다.

그녀는 못 본 척, 서둘러 휴대폰을 던져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근무하는 병원에 문자로 휴가를 내고 다른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그 곳은 최근 몇 년간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사립 병원으로, 비싸긴 해도 평판이 좋고, 무엇보다 비밀 유지가 철저했다.

어느덧 도심 병원을 능가할 기세였다.

서하윤은 마스크를 쓰고 대기실로 들어가, 고개를 숙인 채 간호사가 자신의 번호를 부르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던 간호사 두 명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저 기장님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우리 병원도 이제 잘나가나 봐. 올해는 대한항공 직원들의 신체검사까지 맡고. 방금 저 기장님 검사할 때 옷 벗었는데, 복근 보고 침 흘릴 뻔했잖아!"

"야, 조용히 해! 그분들 나오신다!"

서하윤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건장한 남자 무리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중 선두에 선 남자는 단연 눈에 띄었다. 모두 똑같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었음에도, 그의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긴 다리가 빚어내는 완벽한 비율은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 강인하고 잘생긴 얼굴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어떻게 심도윤일 수가…'

서하윤은 머리가 윙 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손바닥을 세게 움켜쥐며 당장이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심도윤과 교류가 많지 않았지만, 그의 일처리가 냉혹하고 신속하며 성격은 음험하고 잔인하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다.

그런 심도윤이 자신이 처녀막 복원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온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결과가 닥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한 간호사가 검사지를 들고 빠르게 걸어 나오며 외쳤다. "7번 환자분 계신가요? 서하윤 씨."

그 말에 심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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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없는 한 번의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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