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유서를 본 순간 도지연은 어머니의 필체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유서에는 더는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과 함께 도지연이 모든 재산 상속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도지연은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고 유서의 내용을 단 한 글자도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수 년 동안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하루 대부분을 혼수처럼 보내던 사람이 직접 유서를 썼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도지연은 유산을 포기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도소희가 비웃으며 말했다. "언니, 모든 걸 잃은 기분이 어때?"
그 말에 도지연은 분노에 피가 서린 눈으로 도소희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모든 게 선명하게 맞춰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도소희와 육호성이 꾸민 수작이 분명했다.
심혜정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산 덕에 평생을 가난에 허덕이던 도건호는 그녀와 결혼하여 하루 아침에 재계의 인물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게 그때부터였다. 도건호가 최미향과 불륜을 저질러 도소희를 낳았음에도 끝내 심혜정과 이혼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바로 돈, 그 하나 때문이었다. 도건호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사랑이 아닌 권력과 돈을 위한 냉혹한 음모였을 뿐이다.
그 사실에 도지연의 눈가가 분노에 뜨겁게 타올랐다. 도씨 가문과 육씨 가문은 그녀 어머니의 재산을 남김없이 빨아 먹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녀마저 내던져 버렸다.
'엄마... 마지막 순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대체 그들이 엄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도지연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어. 진실을 세상에 밝혀서 너희들이 저지른 죗값을 똑똑히 치르게 할 거야. 그리고 절대 엄마의 재산을 단 한 푼도 받지 못 하게 할 거야. 엄마를 이렇게 만든 죗값은 반드시 피로 갚게 하겠어.'
그때, 도소희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똑똑한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호성 씨 눈에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여자일 뿐이야. 배운 것도 없는 무식한 여자. 하지만 나는 달라. 명문대 출신에 해외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나야말로 호성 씨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지."
육씨 테크는 수년간 제자리걸음이었다. 기술 개발이 한계에 부딪히며 위기에 처해 있었고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곧바로 상장이 가능했다. 그렇게만 되면 육씨 가문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치솟을 터였다.
그들의 마지막 희망은 IT 업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케이였다. 몇 년 전, 케이는 단 한 줄의 코드로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에 그를 영입하는 자는 단숨에 업계의 왕좌를 차지하고 명문가인 하씨 가문을 뛰어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거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도소희는 더욱 거만한 태도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이전에 유학 시절에 운 좋게 케이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분이 날 거의 제자처럼 아껴주셨지. 오직 나 만이 그 분과 연락을 할 수 있어."
"정말이야?" 도소희의 말에 육호성이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업계의 거물들이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찾지 못한 케이를 소희가 알고 있다고?'
이에 도소희는 육호성의 품에 파고들며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는 케이가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허풍으로 육호성의 아내 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끝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을 생각이고 절대 그 거짓말이 들통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떄, 도지연이 짧게 코웃음을 치자 육호성이 고개를 홱 돌리며 경멸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배운 것도 없는 네가 케이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 리가 없지. 어쨌든 내일 우린 이혼이야. 네 짐은 전부 빼서 내보낼 테니 다시는 우리 집에 얼씬도 하지마."
말을 마친 그는 도소희의 허리를 감싼 채 유유히 병원 복도를 떠났다.
도지연은 그들의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의 학력은 보잘것없었지만 어린 시절 극비리에 진행되는 천재 양성하는 프로그램에 발탁되었다. 이에 코딩은 언제나 그녀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도지연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냈고 화면에는 그녀가 3년간 공들여 완성한 코드의 한 줄이 떠 있었다.
전 세계가 찾아 헤매던 전설적인 인물 케이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육씨 가문의 그늘에 숨어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육씨 테크를 위해 버그를 수정했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 드디어 코드를 완성했다. 원래는 오늘 그걸 육호성에게 넘길 예정이었지만 이제 그 생각은 그저 말도 안 되는 농담일 뿐이었다.
도지연은 휴대폰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이 코드 하나면 육씨 테크를 정상으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반대로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한편, 병원 VIP실 앞에서 담당 의사가 하준우에게 하상원의 상태를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과민 반응을 보인 것 같습니다. 손가락이 움직인 건 단순한 반사 작용일 뿐이에요. 회장님께서는 여전히 의식이 없으십니다."
그 말에 나 비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불찰입니다, 도련님. 회장님께서 깨어나신 줄 알고 제대로 확인도 없이 섣불리 보고를 드렸습니다."
"아니, 누군가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내가 그룹을 상속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수작이지."
그러자 나 비서는 고개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연숙 여사님 짓이겠군요."
정연숙은 하준우의 계모로 수년간 그룹의 통제권을 호시탐탐 노려왔다.
나 비서의 말에 하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 분이 마음이 급해졌군."
"그래서 노부인께서 자꾸 도련님께 여자를 붙이시려는 거였군요. 저희 쪽에서 선수를 치지 않으면 정연숙 여사님 쪽에서 먼저 움직일 테니까요."
그 말에 하준우는 고개를 숙여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간이 얼마 없어. 빨리 결혼할 여자를 찾아야 해.' 결혼은 정연숙이 또 다시 그런 짓을 하지 못 하게 막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문득 얼굴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어젯밤의 그 여자였다.
"사람 하나 찾아줘."
"누구를 말씀이십니까?"
"어젯밤 그 여자." 하준우의 음성엔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한편, 도지연은 복도에 서서 어머니의 시신이 실려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병원 복도를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VIP 병실 앞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고 단호하게 비서를 향해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남성의 날카로운 옆 선과 냉혹한 눈빛을 보자 도지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비서의 목소리가 복도를 가로질러 날아왔다. "알겠습니다, 하 도련님."
그 말에 도지연은 즉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 도련님? 설마 하씨 가문...?'
동시에 하준우도 고개를 들어 도지연을 보았고 그의 차가운 눈빛에 도지연은 더욱 온 몸이 얼어붙었다.
그때, 나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여자를 찾으러 나가겠다고 말하자 하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말을 내뱉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도지연에게 머물렀다.
회차 3
나 비서가 하준우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 시선 끝에 도지연이 서 있었다. 그러자 그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누군가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도련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함정일 수 있어요."
나 비서의 말에 하준우는 좀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지 알아봐."
그 한 마디에 나 비서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반면, 하준우를 알아보지 못한 도지연이 자리를 뜨려 몸을 돌리자 순간 등 뒤로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이제 와서 밀당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 말에 도지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그러나 하준우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웃기군. 아침까지만 해도 어젯밤 일은 없던 걸로 하자더니 몇 시간도 안돼서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다니.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내 관심을 끌겠다는 건가?"
그 말에 도지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눈앞에 서 있는 남성은 바로 어젯밤에 자신의 첫 경험을 앗아간 그 남자였다.
그때, 나 비서가 급히 돌아와 하준우의 귀에 속삭였다. "이름은 도지연, 도건호 회장의 장녀입니다. 그리고 모친은 조금 전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하준우는 도지연의 손에 말라붙은 피와 붉은 얼룩이 흰 드레스 자락에 번져 있는 걸 보았다. 이에 그는 나 비서를 향해 짧게 명령을 했다. "데려가서 씻겨."
이후, 도지연은 하준우의 집으로 옮겨졌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자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한편,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앉아 있던 하준우는 은색 라이터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며 줄곧 도지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제 말해 봐,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그 말에 도지연은 그 앞에 꼿꼿이 서서 담담하게 답을 했다. "난 그쪽 할머니가 누군지도 몰라요. 하 도련님,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더 볼일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하준우는 여전히 비웃으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내 성까지 아는 주제에 모르는 척이라니. 그래, 좋아. 정연숙의 심부름꾼이 아니라면 이 게임에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우리 거래하지." 하준우가 라이터를 탁자 위로 던지며 말을 내뱉자 도지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거래? 대체 무슨 거래?' 지금 도지연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에 하씨 가문 사람이 그녀에게 바랄 게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하준우가 유리 탁자 위로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읽고 사인해."
도지연은 계속해서 경계를 하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게 뭐죠?"
"혼전 계약서." 하준우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덤덤하게 답을 했다.
그 말에 도지연이 놀라 눈을 크게 뜨자 하준우는 날카롭게 조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게 당신이 원하던 거 아니야? 애초에 하씨 가문 며느리 자리를 노린 거잖아."
그 말에 도지연은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오해가 있었나 보네요. 저 결혼했습니다."
그 말에 하준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도지연에게 다가갔다.
삼나무 향과 은은한 연초 냄새가 공기를 타고 번지자 도지연은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그렇게 남편에게 충실한 여자가 어젯밤엔 왜 날 거부하지 않았지?"
그의 조롱 섞인 말에 도지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그는 술에 취해 있어서 도지연이 조금만 더 강하게 그를 밀어냈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하준우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할머니가 당신을 고른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남편하고 이혼하고 나랑 결혼해. 그럼 원하는 건 뭐든 갖게 해줄 테니."
그 말에 도지연의 눈빛이 강하게 흔들렸다. 그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오해를 이용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실 도소희의 말이 맞았다. 지금 그녀 혼자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복수를 하려면 강력한 뒷배가 필요했고 하씨 가문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도지연 앞에 선 남자는 온 몸으로 권력의 냄새를 풍겼고, 지금 있는 그 집 마저 강렬하게 그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재벌 2세가 아니라 권력의 정점에 선 남자다.
도지연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도씨 가문과 육씨 가문 모두 그녀를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잃을 게 없었다.
그 생각에 도지연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좋아요. 그 거래, 하죠."
이후, 도지연은 빠르게 혼전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그러나 빼곡한 법률 조항에 눈살을 찌푸리며 하준우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직접 읽어주세요. 이런 거 보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서요."
그러자 하준우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 누구도 감히 그에게 그런 사소한 일을 시킨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난독증이 있어요. 그래서 글자들이 전부 뒤섞여 보여요."
도지연의 말에 하준우는 잠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을 아예 못 읽는 거야?' 하지만 그는 곧 의심을 거두었다. '할머니가 글도 못 읽는 여자를 골랐을 리 없지.'
이에 하준우는 서류를 옆으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부 내용은 몰라도 돼. 중요한 건 세 가지뿐이야. 첫째, 이 결혼은 일 년짜리 계약이고 일 년이 지나면 무조건 끝이야."
그 말에 도지연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고작 일 년? 별 거 아닌데?' "좋아요."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둘째, 혹시라도 임신하면 아이는 내가 키울 거야. 당신은 그냥 떠나면 돼. 아이에 대한 권리는 일절 없어."
그 말에 도지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냉혈한 인간이군.' 하지만 그녀는 애초에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알겠어요. 마지막은요?"
그러자 하준우는 조금 더 도지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낮게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 같은 건 얻을 생각하지 마. 사랑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란 말이야. 난 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너도 내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마."
그 말에 잠시 도지연의 눈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 하준우는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지만, 그녀에겐 단지 낯선 사람일 뿐이다. '낯선 사람인데, 어떻게 사랑하겠어.'
이에 그녀는 주저 없이 펜을 들어 계약서에 서명했다.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죠, 하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