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김이서는 깊이 숨을 들이키며 가슴 속으로 서글픔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예전 같았으면, 아마 몇 마디쯤 맞받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이 없는 집. 억지로 붙들고 있어봤자 돌아오는 건 더 많은 상처와 모욕뿐이다.

바로 그때, 윤은채가 장부로 보이는 서류를 던져왔다.

"이건 네가 지금까지 윤씨 가문에 있으면서 쓴 돈이야. 총 2억. 갚아, 전부."

김이서는 멈칫하더니 이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싸늘한 기운이 마음속을 휘감았다. 그 장부엔, 그 동안 그녀가 쓴 모든 금액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피아노 수업 1시간에 10만 원. 필라테스 1시간에 16만 원.

'이게 정말 가족끼리 할 짓인가? 어떻게 같은 지붕 아래에 살았던 가족이, 이런 서류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윤은채는 김이서의 잔뜩 굳은 얼굴을 보더니 기세 등등하게 앞으로 다가갔다.

"참고로 알려주자면, 이 명세서는 엄마 아빠가 직접 만든 거야. 아, 맞다. 듣자 하니 네 친부모는 완전 찢어지게 가난하다며? 네가 2억이나 빚을 진 소식을 알게 된다면 아마 널 당장 내쫓으려 할 거야. 하하하."

오만한 웃음소리와 얼음장 같은 말투에 김이서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바로 그 순간, 김이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윤은채의 얼굴을 향해 날아 들었다.

"꺅." 윤은채는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은채야!"

임유주가 허둥지둥 달려와 윤은채를 부축해 조심스럽게 바닥에서 일으켰다.

그러더니 곧바로 김이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 년! 감히 우리 은채를 때려?"

윤은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악독한 표정을 감쪽같이 숨기고 대신 눈물을 글썽이며 한껏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 언니를 원망하지 마세요. 다 제가 괜히 참견해서 그래요. 언니한테 너무 늦게까지 밖에 있지 말라고 한 것 뿐인데... 사실 언니가 이렇게 반항적으로 나오는 것도 어쩌면 제 탓일지도 몰라요. 제가 돌아오는 바람에 언니가 자신의 자리를 뺏겼잖아요. 그래서 저를 아주 미워하고 있을 거에요."

김이서는 윤은채가 어떻게 사실을 제 멋대로 왜곡하는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건 임유주의 그 한마디였다. '미친 년?'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는 단어였고 심지어 그 건 다름아닌 그녀를 18년 동안 키워 온 사람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었다.

김이서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용히 2억 원의 명세서를 집어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직접 만든 명세서라고 들었어요. 지금 저한테 이 돈을 갚으라고요?"

"언니, 엄마 아빠가 이렇게까지 한 건 언니에게 그 동안 윤씨 가문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줬는지 깨닫게 하려는 거였어.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아까 엄마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윤은채가 나서서 해명했다.

"김이서가 뭐라고 했는데?"

화가 잔뜩 난 임유주는 증오가 섞인 눈빛으로 김이서를 쏘아보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윤은채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음을 보여 줬다.

바로 그때, 윤씨 가문의 가주인 윤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원래 이 명세서로 그저 널 경고하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감히 동생을 때려? 이제, 이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할 거다. 만약 못 갚겠다면 법원에 고소하고 말겠다."

김이서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바로 그녀를 18 년 동안 키운 부모다.

그들은 집에 데려온 지 고작 며칠 밖에 안 되는 친딸의 말만 믿고 김이서를 아주 악독하고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김이서는 편애에 눈이 먼 둘을 바라보고 있으니 더 이상 해명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윤 대표님, 임 여사님. 어쨌든 저를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돈,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 저와 윤씨 가문의 인연은 완전히 끝입니다."

"좋아. 어디 그렇게 계속 잘난 척해봐. 윤씨 가문이라는 이름 없이, 네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김이서는 차갑게 코웃음을 지어 보이며 조용히 바닥에서 백팩을 주워 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저택을 떠났다.

그 동안 김이서는 이 집에서 사랑이란 걸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 가문을 떠나는 순간에도 2억이라는 빚 고지서가 날아 들었다.

한편, 윤은채는 김이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교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내가 윤씨 가문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게 됐어.'

"아빠, 너무 화내지 마세요. 언니도 시간이 지나면 윤씨 가문의 은혜를 알게 될 거예요. 그러면 분명히 돌아와서 무릎 꿇고 사과할 거예요."

윤은채는 화가 잔뜩 난 윤준호에게 부채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흥, 정말 후회한다고 해도 우리 윤씨 가문의 문턱을 넘지 못할 거다. 길러 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 차라리 바깥에서 굶어 죽는 게 나아."

어느새 분노가 윤준호의 얼굴을 집어 삼켰다. 반면, 그가 화를 내면 낼 수록 윤은채는 더더욱 득의 양양한 모습이었다.

'김이서, 넌 영원히 우리 집에 다시 돌아올 수 없어.'

"은채야, 앞으로 다시는 저 년을 언니라고 부르지 마. 저 년은 네 언니가 될 자격 없어. 어서 옷 갈아 입어. 곧 귀한 손님이 오실 거니까. 우린 반드시 이번 기회를 잘 잡아야 해."

"귀한 손님이요?"

여태껏 이렇게까지 진지한 윤준호의 모습을 본 적 없는 임유주는 자연스레 상대방이 심상치 않은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A 시의 어둠의 황제 서우진이야."

서우진이라는 이름에 임유주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서우진, 그는 음지와 양지 양쪽 세계에서 모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물로, 수단이 잔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평소에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를 한번 만난다는 건 하늘에 별 따기 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윤씨 가문에 직접 찾아온다고?

"참, 이번엔 우리가 은채 덕 좀 봤지. 서우진이 글쎄 윤씨 가문의 따님을 만나 뵙겠다고 하지 뭐냐."

윤준호는 윤은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순간, 윤은채는 멍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어떻게 서우진과 같은 인물을 알고 있었겠는가?

'혹시 전에 강서구에서 종이 박스를 줍고 있을 때 서우진이라는 사람이 나한테 반했던 걸까? 확실해. 분명히 나처럼 이렇게 예쁜 여자가 종이 박스를 줍는 모습에 강한 반전 매력을 느끼고, 그때부터 눈 여겨 본 게 틀림없어.'

윤은채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제가 예전에 강서구에 있을 때 저를 한 번 본 적이 있나 봐요. 우진 씨가 아직도 기억하시다니, 저도 좀 의외네요."

"좋아, 아주 좋아."

윤준호는 크게 미소를 지으며 윤은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은채야, 넌 정말 복덩이야, 우리가문에 복덩이가 굴러 들어왔어! 이번에 강서구 땅만 확보한다면 우리 윤씨 그룹은 한 단계 위로 도약하게 될 거야."

회차 3

윤씨 가문 저택에서 나온 김이서는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고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18년 동안 살았던 집을 돌아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이서는 점점 더, 예전의 자신이 가문을 위해 그렇게나 많이 희생하고 열성을 바쳤던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었는지를 실감했다.

결국 이렇게 쫓겨나는 신세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김이서는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는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고 바로 그녀의 친부모가 살고 있는 주소였다.

A 시의 강서구. 사람들 사이에서 소위 슬럼가라고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끼니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고 배고픔에 익숙했다.

강동구가 부자들의 천국이라면, 강서구는 가난한 자들의 지옥이었다.

김이서가 그곳에 나타나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녀에게 꽂혔다.

그들의 눈동자 속엔 호기심과 의혹이 가득했다.

'저렇게 예쁘고 기품 있는 여자가 왜 이런 곳에 온 걸까?'

김이서는 도도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고귀한 기품 덕에, 이곳 사람들은 그녀가 강동구의 부잣집 아가씨 일거라고 짐작했다.

한편, 김이서는 그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곧 허름한 집 앞에 다다랐다.

낡고 심지어 벽에 금이 간 집을 바라보며 김이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집안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아가씨, 누굴 찾으러 오셨어요?"

뒤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김이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칠고 까만 피부의 한 여자가 조심스레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김이서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 여자의 표정엔 놀라움이 스쳤다.

"너, 너는..."

"저는 김이서라고 합니다." '쿵.'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채소가 전부 바닥에 떨어졌다.

"네, 네가 이서야?"

그녀의 두 눈엔 놀라움과 의아함, 그리고 죄책감까지 섞여 있었다.

"정말 이서구나."

그녀는 김이서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의 손은 허공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네요."

여자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며 다급히 바닥에 떨어진 채소를 주워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저는 진실을 알고 싶어요."

김이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김이서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여자의 마음에 강한 파장이 일었고 그리고 그 파장으로 인해 눈가에 눈물이 핑 맺혀버렸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자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등을 돌린 채 힘없이 말하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이서는 담담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녀는 친어머니를 보면 분노할 줄 알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이어 김이서는 집 안으로 들어섰고

허름한 가구들과 낡은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이 가족들이 그 동안 얼마나 궁핍한 삶을 살아왔는지, 그대로 느껴졌다.

"여보, 왔어? 요즘 큰애가 계속 야근하니까 저녁엔 보양 탕이라도 끓여줘야겠어."

방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김이서를 발견한 순간, 그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 아가씨는..."

"여보, 이 아가씨는... 이서예요."

"이, 이서라고?"

김천호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지만 그는 그걸 감추려 안간힘을 썼다.

"이서, 이서라니? 그게 누구야?"

"천호 씨. 이제 숨길 필요 없어요."

유수민은 한숨을 내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이서가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 이미 진실을 알아버린 거겠죠. 이 비밀을 가슴속에 묻고 산 지 너무 오래됐어요. 전 이제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오늘, 그냥 제가 시원하게 말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유수민은 고개를 돌렸다.

김이서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유수민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편, 그 모습에 김이서의 마음도 살짝 흔들렸고 차분했던 그녀의 마음속에서 알지 못할 감정이 밀려왔다.

"하아."

김천호는 한숨을 내쉬며 유수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이 비밀을 품고 살아온 오랜 세월 동안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지."

김천호는 김이서를 깊이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엔 깊은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이서야. 우리가 정말 미안해."

김이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질문을 꺼냈다.

"그때, 왜 저를 버렸어요?"

이토록 직접적인 질문에 김천호와 유수민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고 결국, 그들은 당시의 진실을 털어 놓았다.

당시, 윤씨 가문의 임유주는 딸이 실종되면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였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윤준호가 김씨 가문의 딸을 입양해 그들의 딸로 키우게 된 것이다.

윤준호가 김이서를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김이서가 어릴 적부터 병약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씨 가문엔 이미 세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집안이 찢어 지게 가난 했기에 병약한 김이서를 키울 여력이 없어 결국 윤준호에게 보낸 것이다.

한편,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김이서는 낡은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유수민과 김천호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였고 그들의 마음속엔 불안함이 엄습했지만 감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서야. 윤씨 가문에서는... 잘 지냈어?"

결국 김천호가 참지 못하고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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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레온 같은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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