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차 2
당소월은 유서에 적힌 필체가 어머니의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유서에는 어머니가 오랜 병마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는 내용과 함께, 당소월이 자발적으로 어머니의 모든 재산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정신병원에 10년 넘게 갇혀 지낸 어머니가 어떻게 갑자기 유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언제 어머니의 재산을 포기하겠다고 했단 말인가?
당유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언니, 모든 걸 잃은 기분이 어때? 꽤 괴롭지?"
당소월은 당유나를 새빨개진 눈으로 쏘아보며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 어머니를 찾아갔을 때만 해도 상태는 무척 안정적이었다. 그런 어머니가 갑자기 자살을 선택했다는 건, 분명 눈앞의 두 사람이 꾸민 짓이 틀림없었다.
명문가 출신인 어머니가 당통해와 결혼하며 가져온 예물이 얼마나 많았던가.
당통해는 그 예물 덕분에 가난뱅이에서 지금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당 회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맹완여와 바람을 피워 당유나를 낳고도 어머니와 이혼하지 않았다. 오직 어머니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당통해가 어머니와 결혼한 것 자체가 처음부터 거대한 음모였을지도 모른다.
당소월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당씨 가문과 육씨 가문은 그녀와 어머니의 뼛속까지 발라 먹고 헌신짝처럼 버렸다.
가여운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을까?
당소월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둘 수 없으며, 어머니의 재산이 저 승냥이 같은 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당씨 가문과 육씨 가문, 모두에게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당유나는 당소월에게 바싹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비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면 뭐해? 육호 눈에 너는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무식쟁이일 뿐이야. 난 해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고, 나야말로 육 사모님이 될 자격이 있지."
육씨 가문은 IT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있었다. 이 문제만 해결하면 육테크는 순조롭게 상장할 수 있고, 육씨 가문의 위상 또한 덩달아 올라갈 터였다.
그래서 육씨 가문은 IT 업계의 신이라 불리는 'K'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K가 과거 인터넷에 공개했던 코드의 절반만으로도 IT 업계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정도니, 그를 찾는다면 하룻밤 사이에 명성을 떨치는 것은 물론, 현재 업계 최고인 하씨 가문까지 뛰어넘을 수 있었다.
당유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해외 유학할 때 운 좋게 K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요. K님은 제 스승님이나 다름없죠. 내가 K님과 연락할 수 있어요."
"정말?" 육호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업계에서 거액을 제시해도 찾지 못한 K를 당유나가 안다고?
당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은 듯 육호의 품에 파고들었다.
당유나가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K를 알 리 만무했지만, 육호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일단 허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육씨 가문의 사모님만 되면, K 한 명 찾는 것쯤이야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소월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차갑게 코웃음 쳤다.
육호는 당소월의 어조에 담긴 경멸을 알아채고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스럽게 말했다.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네가 K님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 알기나 하겠어? 내일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네 물건들은 전부 집 밖으로 내던져 놓을 테니, 육씨 가문에 다시는 얼씬도 할 생각 마."
육호는 당유나의 허리를 감싸 안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당소월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그녀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건,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한 신비한 조직에 발탁되어 재능을 키웠기 때문이었다.
코딩은 그녀의 수많은 특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당소월은 휴대폰을 켰다.
화면에는 그녀가 3년간 밤을 새워가며 완성한 코드가 떠 있었다.
IT 업계가 3년 동안 찾아 헤맨 K는, 바로 육씨 가문에 숨어 지내던 당소월 자신이었다.
그녀는 육씨 가문을 돕기 위해 밤낮으로 버그를 수정했고, 마침내 어제 코드의 후반부를 완성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 코드를 육호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전부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
당소월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이 코드는 육씨 가문에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육씨 가문과 당씨 가문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VIP 병실 밖.
주치의가 하준서에게 하준림의 상태를 보고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너무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손가락을 움직인 건 식물인간에게 흔히 나타나는 반사 작용일 뿐, 하 회장님은 아직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나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 불찰입니다. 회장님께서 깨어나셨다고 착각하여 확인도 없이 바로 이사님께 보고드렸습니다."
하준서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아버지가 깨어날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내가 하씨 그룹을 상속받는 걸 방해하려는 거겠지."
나 비서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설마 정..."
정연연은 하준서의 새어머니로, 하씨 그룹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였다.
하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기다릴 수 없나 보군."
나 비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할머니께서 이사님 곁에 여자를 두려고 하신 이유가 있었네요. 할머니께서 먼저 손을 쓰지 않으셨다면, 정연연이 이사님 곁에 사람을 붙였을 겁니다."
하준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정연연이 그의 곁에 여자를 붙이기 전에, 그는 반드시 명분 있는 아내를 찾아야만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에 어젯밤 침대에 누워 있던 여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하준서는 나 비서에게 말했다. "사람 좀 찾아줘요."
"누구를 찾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어젯밤 그 여자."
장례식장 직원이 당청아의 시신을 옮기는 것을 본 당소월은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병원을 헤매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어느새 VIP 병실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부하 직원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있었다.
당소월이 막 몸을 돌리려던 그때, 부하 직원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하 이사님."
당소월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하씨 가문 사람?
하준서는 고개를 들었고, 당소월의 초점 잃은 텅 빈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사람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겠군." 하준서는 당소월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회차 3
나 비서가 하준서의 시선을 따라 당소월을 쳐다봤다.
하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마치 일부러 연출한 것처럼 보였다.
나 비서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덫일 수도 있습니다."
하준서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저 여자가 왜 병원에 나타났는지 조사해 봐."
나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당소월은 하준서를 알아보지 못하고 돌아서려 했다.
"밀당이라도 하는 건가?" 하준서가 그녀의 등 뒤로 비꼬는 말을 던졌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당소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준서는 그녀 앞으로 다가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침에는 고고한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더니, 몇 시간도 안 돼서 내 앞에 나타나 우연을 가장해서 내 관심을 끌려는 건가?"
당소월은 눈을 깜빡였다.
혹시 이 남자가 자신의 첫날밤을 앗아간 그 남자란 말인가?
그때 나 비서가 황급히 달려와 하준서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 여성의 이름은 당소월입니다. 당통해의 맏딸로, 모친이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는데, 결국 살리지 못하고 방금 사망했다고 합니다."
하준서는 미간을 흠칫 떨며 시선을 내리다가,
그제야 그녀의 손과 치마에 묻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하준서는 턱짓을 하며 말했다. "저 여자 데려가서 씻기고 옷 갈아입혀."
하준서의 집에 끌려온 당소월은 샤워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흩어졌던 정신을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하준서는 소파에 떡하니 앉아 차가운 은빛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를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하준서가 당소월을 꿰뚫어 볼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당소월은 하준서 앞에 서서 말했다. "저는 하 이사님 할머님을 모릅니다.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더는 할 말이 없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준서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성이 하 씨인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정연연의 사람이 아니라면, 이 여자가 부리는 어설픈 잔꾀쯤은 눈감아 줄 수 있었다.
"거래를 하나 하지." 하준서는 은빛 라이터를 탁자 위로 던지며 당소월을 쳐다봤다.
당소월은 어리둥절했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자신이 하씨 가문의 눈에 들 만한 가치가 있기나 한 걸까?
하준서는 당소월의 앞에 계약서를 던졌다. "사인해."
당소월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게 뭐죠?"
"혼전 계약서." 하준서는 다리를 꼬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 모습에서 기품이 흘러넘쳤다.
당소월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준서는 그런 그녀를 보며 비웃었다. "그렇게 머리를 굴린 게 결국 나랑 결혼이라도 하고 싶다는 거 아니었나?"
당소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 이사님,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결혼한 몸, 유부녀입니다."
하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소월에게 다가섰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뒤덮었다.
상쾌한 나무 향이 코끝을 스치자, 당소월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하준서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비꼬았다. "그렇게 정숙한 분께서 어젯밤엔 왜 내 밑에서 울었을까?"
당소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젯밤 남자는 술에 취해 거의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만약 그녀가 완강히 저항했다면 처녀성을 잃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할머니 마음에 든 사람이라니, 분명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겠지." 하준서는 당소월의 턱을 들어 올려 그녀의 예쁜 얼굴을 마주했다. "육호와 이혼하고 나랑 결혼해. 후회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당소월은 눈을 깜빡였다.
남자의 말을 곱씹어보니, 두 사람 사이에 단단히 오해가 있는 듯했다.
어쩌면 이 오해를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당유나의 말이 맞았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그녀가 복수를 하려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었다.
만약 하씨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눈앞의 남자는 귀티가 흘렀고, 이 호화로운 별장만 봐도 하씨 가문에서 그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육씨 가문으로는 돌아갈 수 없으며, 당씨 가문에서는 헌신짝처럼 버려졌으니, 그녀는 발붙일 곳조차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소월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아요." 하준서는 혼전 계약서를 당소월의 앞에 내밀었다.
당소월은 계약서에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는 계약서를 남자에게 다시 밀었다. "읽어줘요."
하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항상 남들이 그에게 계약서를 읽어줬지, 그가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난독증이 있어서 글자가 많으면 머리가 아프거든요." 당소월이 말했다.
하준서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설마 문맹은 아니겠지?
할머니가 문맹인 여자를 자신에게 보냈을 리는 없었다.
하준서는 계약서를 한쪽으로 던지며 차갑게 말했다. "세 가지만 기억해."
"첫째, 우리 결혼의 유효기간은 1년이야. 1년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혼한다."
당소월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1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좋아." 당소월은 흔쾌히 대답했다.
하준서는 당소월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둘째,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내가 갖고 넌 버린다. 그리고 아이의 생모가 너라는 사실을 평생 부정해야 해."
당소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잔인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임신할 생각이 없었다.
"좋아요." 당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조건은 뭐죠?"
하준서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당소월을 내려다봤다. "마지막 조건이자 가장 중요한 조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고, 너도 나를 사랑할 생각 따위는 꿈도 꾸지 마."
당소월은 눈을 깜빡였다.
솔직히 말해 눈앞의 남자는 외모도 몸매도 훌륭했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낯선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당소월은 펜을 들어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하 이사님 뜻대로 하죠."